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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리스디리_퍼온글



와리스 디리

뉴욕의 패션계에서 세계적인 모델로 활약하는 와리스 디리는 1965년, 소말리아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 가족의 생존한 열두 아이 중 하나로 태어났다. ‘사막의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 역시 이 지역의 ‘관습’에 따라 다섯살 적 어느 밤중, 어머니 손에 이끌려 마을의 주술사 노파 집에 도착해 녹슨 칼끝에 여린 몸을 내어놓아야 했다. 살점을 도려낸 상처는 몇달 넘게 핏자국과 고름이 범벅된 채 찢어지게 아팠고, 어린 소녀는 밤에도 신음 소리를 내며 한달 넘도록 자리에 누워 지냈다. 친언니 하나와 사촌언니 둘은 이 비위생적인 음핵 제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아프리카 북부에서 널리 행해지는 이 해괴망측한 ‘전통’에 대해,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는 명시된 바가 없다고 한다. 그건 종교 전통이 아니라, 여성의 쾌락을 용납할 수 없는 근엄한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이다. 순결한 처녀로 자라기 위해 먼저 할머니들이 칼질을 하고, 정숙한 아내로 살기 위해 다시 남편의 칼이 그곳을 갈라낸다는 엽기적 상상력! 이는 숨통을 조이는 가부장 사회에서 분노와 일탈을 꿈꾸는 대신 굴종과 순응의 생존법을 터득하고 알아서 기는 앞잡이 여성, ‘가부장제 지킴이’ 노릇을 하는 음산하고 비굴한 늙은 여성들에 의해 더욱 야비하고 끈끈하게 보존되었을 게다. 그래서 이집트와 케냐의 경우, 이 끔찍한 관습을 금하는 법률까지 공표되었지만 수백년 넘은 악습은 좀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열네살이 된 와리스 디리는 낙타 다섯 마리와 바꿔져 육십 먹은 영감의 신부로 팔려가기 직전, 여러 날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수도인 모가디슈 언니 집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손길로부터 좀더 안전한 런던, 영국대사였던 친척 집에서 4년 동안 식모살이를 하며 홀로 글을 익힌다. 친척이 귀국한 뒤에도 그녀는 런던에 남아 맥도널드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한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되고, 파리와 밀라노의 패션쇼 출연에 이어 레블론과 로레알의 화장품 모델로도 얼굴이 알려지게 됐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1997년 자신의 아픈 과거를 고백하고, 음핵 절제로 고통을 겪지만 제 소리를 낼 수 없는 수백만의 자매들을 대표하는 유엔 명예대사로 임명돼, 전세계를 돌며 아프리카 여성의 인권을 호소하고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선 매년 200만명의 소녀가 야만적인 할례 의식 때문에 죽어갑니다. 저도 한 여성으로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학대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여성을 도웁시다.”

어느덧 세계적인 슈퍼모델의 열반에 오른 와리스 디리는 ‘사막의 꽃’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에 대해 역시 유목민다운 결론을 내린다. “난 어디서도 내 삶을 즐거운 것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고, 언제라도 거길 떠날 수 있다. 삶은 움직이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