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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강수진 … 마흔셋, 나이를 뛰어넘는 발레리나

강수진 … 마흔셋, 나이를 뛰어넘는 발레리나

세상 참 얄궂다. 사람들은 계속 궁금해 한다.


그가 언제 은퇴할지, 언제 무대를 떠날지. 정작 본인은 무덤덤하다.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 뿐이다. “날로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과 함께.

올해 마흔셋. 발레리나 강수진의 나이다. 발레계에서 “마흔 살=은퇴”라는 건 하나의 불문율이다. 대부분은 마흔 살 이전에 은퇴하지만, 설사 그때까지 버틴다 해도 무대에 서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세계 최고 발레단인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발레리나가 마흔이 되면 강제로 은퇴시킨다. 신체 생리상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이요, 더 이상 하는 게 오히려 몸에 나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강수진, 이런 상식을 거부한다. 말이 아닌 몸으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지난 9일부터 사흘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갈라 공연 ‘더 발레’에서 강수진은 눈부셨다. 점프는 여전히 가뿐했고, 균형 잡힌 동작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표정에선 눈물을 머금었고, 발걸음엔 사연이 있었으며, 손으론 아픔을 전해주었다. 숨죽였던 2000여 명의 관객은 커튼콜 때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건 ‘발레 여제’ 귀환에 대한 환호를 넘어, 한계와 맞서 싸우고 있는 한 인간에 대한 경외였다.

발레리나 강수진, 과연 그의 끝은 어디일까.



강수진씨와의 인터뷰는 15일 오후 그가 묵고 있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진행됐다. 사흘간의 서울 공연과 경남 창원 공연(13일)까지 막 마친 뒤였다. “예술에 대한 갈증 때문일까요. 창원에선 관객 반응이 너무 뜨거워 커튼콜 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라고 그는 운을 뗐다. 강씨는 “기자분들 만나기가 미안해요. 새로운 게 있어야 ‘뉴스거리’가 되는데 전 늘 똑같잖아요. 생활도 한결같고, 신변에 변화도 없고. ‘은퇴 언제 하느냐’ 물어도 ‘계속 하겠다’는 말만 하고. 기사를 위해 ‘그만 두겠다’고 깜짝 발표라도 할까요?”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괄호 안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다.

-‘더 발레’ 공연에 대한 평이 뜨겁습니다.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신 걸로 아는데(갈라 공연인 ‘더 발레’는 9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됐고, 그중 강씨는 4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런가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발레 갈라 공연은 비슷비슷하잖아요. 제가 했던 ‘강수진과 친구들’도 그랬고. 몇 바퀴 더 도느냐, 얼마나 높이 뛰느냐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고.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네오클래식을 중심으로 하면서 클래식 발레와 모던 발레를 섞었죠.”

-연출을 해도 될 것 같던데요?

“음, 연출이나 예술감독은 괜찮을 거 같아요. 하지만 안무는 소질이 없어요. 전 제 자신을 잘 알아요.”


-무엇에 중점을 두고 프로그램을 짜셨나요?



“처음 보는 관객이 질리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죠. 세련된 동시대의 발레 언어로 슬며시 얘기를 건네고선(첫 프로그램인 ‘스위트 NO.2’는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에 맞춰 절제미가 돋보였다) 조금 몸을 들썩였다가(두 번째 프로그램 ‘에피’는 마치 비보이 공연을 보듯 역동적인 모던 발레였다), 파격과 코믹을 버무린 뒤(중간 부분 ‘베이퍼 플레인즈’는 서커스를 방불케 했고, ‘발레 101’에선 객석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마지막은 뭉클함을 선사하는 식으로요(마지막 ‘카멜리아 레이디’는 강수진표 드라마틱 발레의 정점이었다). 갈라 공연은 어찌 보면 풀 코스 요리잖아요. 대신 어떤 흐름이 있어야 하죠.”

-최고의 기량을 갖고 있지만 늘 ‘관객’ ‘대중’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아요.


“어릴 때 전시회에 간 적이 많아요. 미술은 저도 잘 모르잖아요. 너무 어려운 현대 미술을 보면 주눅이 들곤 했어요. 대신 친절한 설명이 있고, 알 만한 그림도 적당히 있으면 내가 모르던 분야에도 조금씩 눈이 가더라고요. 그런 경험이 영향을 준 거겠죠. 전 발레 하는 후배들이 다방면을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저만 해도 어릴 때 한국 무용을 2년 배웠는데 그런 덕인지 아무리 서양 발레를 해도 호흡이나 팔동작 등이 다른 발레리나와 조금 달랐어요. 음악·미술도 많이 알수록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전체적인 예술 흐름도 알게 되고, 그게 자연스레 작품에도 묻어나고. 또 발레에서 중요한 게 얼마나 빨리 스텝을 외워 그걸 체화시키느냐에요. 그러려면 수학적 사고도 있어야 하고, 집중력·순간판단력·분석력도 있어야 하거든요. ‘머리가 둔하면 발레 못한다’ ‘눈이 넓어야 발이 빨라진다’고 후배에게 많이 얘기합니다.”

-프로그램도 좋았지만, 강수진씨의 연기 역시 최고였다고들 합니다. 어떻게 계속 유지를 할 수 있는 건가요.

“연습이죠. 너무 재미 없죠. 근데 그런 심심한 대답 말고는 정말 딴 방법이 없어요. 예를 하나 들까요. 전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두 시간가량 합니다. 말이 스트레칭이지 사실 발레의 기본 동작을 다 마스터한다고 보시면 돼요. 전 그걸 발레 시작한 이후 그러니깐 이제 30년이 됐죠. 부상으로 도저히 무대에 설 수 없을 때를 빼곤 거른 적이 없어요. 한 번도요. 휴가 때도 하고, 해외 공연을 나가도 합니다. 스트레칭을 하기에 호텔방이 좁아 방을 바꾼 적도 여러 번이에요. 아침 연습이 제대로 돼야 발레단으로 출근해요.”


-반복 훈련이 힘들거나 지루하진 않나요.

“저도 사람인걸요. 왜 힘들지 않겠어요.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너무 찌뿌둥한 거예요. 남편한테 ‘오늘 안 할 거다’고 몇 번을 얘기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연습하는 방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러곤 몸이 조금씩 움직여지고. 아마 그날은 평소보다 더했을 겁니다. 남편이 ‘너 그럴 줄 알았어’라더군요. 인이 배긴 거죠.

제 일상은 너무 똑같습니다. 수도하는 사람 같아요. 근데 그게 좋아요. 겉은 똑같지만 안은 조금씩 변하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제 몸이 어떻다는 걸 더 잘 알게 되고, 그렇게 터득한 몸놀림을 발레에 적용하니 기량도 그만큼 늘어나고. 전 하루하루가 신비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제쯤 은퇴를 하실 것 같은가요. 5년 후?

“정말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무대에서 걷지는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 점프를 하느냐가 아니라 제 몸에 활력이 떨어질 때, 제가 성에 안 찰 때, 무대에 서는 게 행복하지 않을 때 은퇴할 거예요.”


-은퇴하시면 한국에서도 러브콜이 많을 것 같은데.

“조건이 맞으면 와야죠. 그 조건이라는 게 무슨 돈이라든가 혹은 자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여건이라고 해야 할까요. 예술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셨으면 해요. 얼마 전 박세은양이 국립발레단을 나와 학교에 진학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 여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거죠. 무용수들이 무용에만 집중할 수 있고, 거기서 충족감을 느끼고 자부심을 갖는. 그런 여건이 된다면 기꺼이 한국에 돌아와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글=최민우 기자
사진=최시내 사진작가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 제공


시시콜콜 강수진

청소기로는 개운치 않아 걸레 들고 빡빡 문지르는 성격


강수진씨의 남편은 터키인 둔치 소크맨(50)이다. 남편 역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무용수였다. 서로 알고 지낸 지는 벌써 24년째. 남편은 강씨의 매니저이자 후원자이며 예술적 조언자다 강씨는 “난 발레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e-메일도 남편이 해준다”고 말한다.

둘은 2002년 1월에 결혼했다. 아직 아이는 없다. 대신 강아지 두 마리를 기른다. 퍼그종이며 이름은 캔디(5살)와 킹콩(3살)이다. 강아지 얘기를 할 때 강씨의 목소리는 가장 들떠 있었다. “아기들”이라고 불렀고, “해외에 나오면 너무 눈에 밟힌다”고도 했다.

남편은 요리를 잘한다. 터키 음식부터 김치찌개까지. 대신 청소는 강씨 몫이다. 청소기를 돌리지만, 그걸로는 영 개운치 않단다. “마지막엔 늘 걸레를 들고 빡빡 문질러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한국어·터키어는 기본이요, 독일에 있으니 독일어, 발레단에선 영어와 프랑스어를 주로 쓰니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셈이다. 본인은 “그냥 엉터리 의사소통을 할 뿐이고,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말한다. 처음 시어머니와 터키어로 전화 통화를 했을 때가 외국어를 하던 중 가장 떨렸을 때란다. “처음엔 개미 목소리였는데 뒤엔 ‘에라 모르겠다’란 심정이었어요. 그냥 아는 단어 막 던졌죠.”

독일에서 강씨의 위치는 어쩌면 한국보다 더 높다. 그가 노란색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노란색 난(蘭)은 ‘강수진 난’으로 불린다. 400여 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역사상 은퇴무용수가 아닌 현역무용수에게 헌정 공연(2007)을 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그는 최근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을 TV로 보았다고 했다. “정말 한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예요. 뭔가 다르고 타고난 거 같고. 스텝·동작·표정…. 정말 ‘와우!’예요.”

최민우 기자


강수진은

1967 출생

1982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입학

1985 스위스 로잔 발레콩쿠르 그랑프리(동양인 최초)

1986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입단(최연소)

1996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무용수 등극

1999 브누아 드 라 당스(발레의 아카데미상) 수상

2007 독일 ‘캄머탠저린’(궁중무용가) 칭호 수여

기사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4/22/3695859.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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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싶은그녀의감동적인말은

"내가나를잘알아요"라고하며겸손해하는모습

"제일상은너무똑같습니다.수도하는사람같아요.근데그게좋아요.겉은똑같지만안은조금씩변하니까요.나이가들수록제몸이어떻다는걸더잘알게되고,전하루하루가신비하고감사할따름입니다.”

그녀의인터뷰기사를읽으며

정말아름답게늙어가고있구나하는느낌이들며

그녀의삶의어느부분은정말닮고싶어진다.